<연극>'벚꽃동산'(2007)'

2010.03.18 20:31에 작성된 글입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으면서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일상과 파티에서 나는 염증을 느꼈었는데 이번에 본 연극 ‘벚꽃 동산’을 보는 동안 상당한 대목에서 이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벚꽃 동산이 경매를 통해 외부인에게 넘겨지게 된 상황에서도 귀족적 취미(예를 들어 악단을 부르는 파티)를 포기하지 못하는 그들에게서 왠지 된장녀가 연상되었다. 점심은 굶을 망정 스타벅스의 커피는 마신다는 된장녀들 말이다. 게다가 ‘공여사’와 ‘공인하’에게서는 피터팬 증후군이라는 병명의 진단을 해주고 싶었다. 특히 ‘공여사’는 목마에 집착을 하는 등 키덜트적 증후가 다분해보였다. 게다가 한국에서 부동산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이란 생각 또한 들었다. 아예 벚꽃동산을 관광명소로 개발하여 돈을 벌 궁리나 하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나치게 벚꽃 동산에 집착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생각날 정도였다. 이들은 특히나 1930년대 일제 강점기하에서의 시대의 고통은 별반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이처럼 연극을 보는 내내 전반적으로 나는 대부분의 배역들이 행동이 결코 곱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연극의 마지막에 그들이 벚꽃 동산을 떠나며 부르는 노래들과 율동 속에서 나는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의 표지에 있던 ‘걷지 말고 춤추듯 살아라’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역시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타산의 관계 속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연극다운 즉흥적 생활 속에서 그들은 순간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았던 것이다. 주변의 환경에 대해 감사해 할 줄 알고 주변 사람들을 도와주고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이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동기가 되는 거 같았다. 그들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따뜻한 인간들이었다. 벚꽃 나무는 잘려나갈 테지만 그들의 희망은 잘려나가지 않았다. 벚꽃 동산의 이전 주민들에게 인생은 걷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걷는 다는 것이 똑바로 앞을 향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춤을 춘다는 것은 순간 순간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걷는 것과 춤을 추는 것 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본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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