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2007) - 2007년 처음 본 연극

2007년에 작성된 글입니다.


 연극을 처음으로 직접 가서 보았습니다.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극 중 내내 배우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연극의 아우라(aura)는 평소 느끼지 못했던 연극의 매일 죽어서 다시 살아난다는 ‘일회성’을 느끼게 해주더군요. 그리고 연극 속의 판소리, 대중음악, 군가, 탈춤은 정말 신명이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특히 억척어멈과 취사병이 함께 추던 거지타령은 정말 직접보지 않고서는 그들의 타령 속에 깃든 슬픔을 느끼기는 힘들 것 같더군요.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극 중 최고의 카타르시스의 장면은 아마 벙어리인 셋째 딸이 시내의 보초병을 깨우기 위해 북을 치다가 빨치산에게 죽는 장면 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느낌으로 그 북소리를 들었겠지만 저에게 셋째의 북소리는 화엄사에서 예불 때 듣던 ‘법고’ 소리처럼 들리더군요. 불교 사찰에서는 아침과 저녁 예불 때 법고와 목어, 운판 그리고 범종을 칩니다. 이 중 법고는 모든 축생의 해탈과 이고득락을 위하여 스님들이 울리는 북입니다. 법고가 모든 축생들의 해탈을 기원하는 북소리라면 셋째의 북소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북소리인 셈이죠. 그녀는 불교에서 말하는 ‘살신성인’을 합니다. 


 이제 극 중 벙어리 딸과 너무 비교되는 주인공인 억척어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죠. 아마 억척어멈의 반대어는 ‘된장녀’ 일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억척어멈처럼 산다면 스타벅스는 지구에서 종말을 맞을 것입니다. 돈 한 푼이라도 어떻게든 아끼려 하고, 산 속의 인민군에게는 밥을 팔고 산 아래의 국군에게는 짚신을 파는 억척어멈은 마치 돈을 쫓는 아귀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전쟁이라는 열악하다 못해 지옥같은 상황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겠죠.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너무나도 귀중한 세 명의 자녀들이 있었으니말이죠.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쫓는 돈은 그녀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첫째는 억척어멈이 권총주머니를 파는 사이 군대에 입대해버리고, 둘째는 출납대원이라는 돈을 다루는 직을 맡게 되었으나 그녀가 그의 금고를 탐내고 그의 몸값을 아끼려다 죽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억척어멈이 시장에 물건을 팔러간 사이에 죽게 됩니다. 그녀의 자식들이 죽은 것만이 그녀의 파멸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떳떳하지 못했으며 돈 계산을 하는 매정한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녀는 그녀가 왜 그렇게 돈을 모으려 했는지를 망각해버린 듯해 보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수레’가 오히려 그녀의 새로운 자식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하지만 셋째의 ‘살신성인’적인 죽음 뒤 그녀는 변합니다. 그녀는 어렵사리 모은 모든 돈을 셋째의 장례식을 위해 내놓게 되죠.(둘째의 시신이 시궁창에 버려진 상황과 대비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이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였으리라 믿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연대를 쫓아 나설 만큼 억척스러운 어머니이니 말이죠. 저는 그런 그녀의 억척스러움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 이러한 억척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구에서 도태되어버린 종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다만 그녀가 각성을 통해 인간애를 곁들인 억척을 배웠기를 바랄뿐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설리번5형제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모두 죽습니다. 그 뒤 그들의 부모님은 결국 평생을 쓸쓸함에 시달리다가 죽습니다. 연대를 따라나선 억척어멈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뭐라 말하기 힘들군요. 세 아이를 모두 잃은 억척어멈의 그 뒤의 삶은 그녀의 몫입니다. 그녀가 극 중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삶은 자기가 개척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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