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을 보고

2007.11.11 11:14에 작성된 글입니다.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을 보고 감상문을 쓰려는데 자신감이 들지 않아 여러 번 글을 썼다 지웠다 했다. 연극 자체의 수준 높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미친 싸이코패스환자같은 발로쟈를 어떻게 해야 처절하게 까발릴 수 있을까라는 나름의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나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도끼로 죽여 버린 라스콜니코프는 결국에는 자신들의 잘못을 참회했다. 하지만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에서 엘레나 선생님은 결국에는 자신이 지키려 했던 정의(正義)를 상징하는 열쇠를 넘겨줘버리고는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발로쟈가 경멸하는 그의 친구들은 그저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어쩔 줄 몰라 할 뿐 이였다. 오직 발로쟈만이 그의 승리를 자찬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했다고 생각하며 당당히 그리고 유유히 극장 밖으로 나가버린다. 나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 발로쟈의 발언에 닥치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그에게 반감이 들었으나 극을 보면서 그를 무어라 비판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었다. 열심히 유교적 인(仁)과 예(禮)를 통한 비판의 근거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혼란의 시대에 과연 이러한 선(善)을 통한 생존이 얼마나 희생과 어려움을 겪을지 알기에 유교적 사상을 통한 비판이 얼마나 유효할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가 춘추말기에 전국을 떠돌며 겪었을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알 수 있었다.


 나이 예순에 귀로 듣는 대로 모든 것을 순조로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공자. 하지만 그는 육십 대의 중반에 큰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채나라에 머물던 공자는 초나라에 가려 하지만 채나라 군인들에게 붙잡혀 있었고 오랜 타지생활과 배고픔, 질병에 시달리던 제자들의 동요가 극심하였다. 무엇보다도 공자를 괴롭혔던 것은 자신의 사상을 펼칠 제후를 찾지 못한 체 여러 해를 방랑하는데서 오는 초조함과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회의적 태도였을 것이다. 제자들의 동요가 심해지자 공자는 으뜸인 제자 셋을 불러들인다. 자로, 자공 그리고 안회였다. 공자는 이들을 각기 불러들여 같은 질문을 던진다. “『시경』에 보면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거늘 어째서 광야를 헤매고 있는가’하고 읊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도가 그릇된 것일까. 우리가 어찌하여 그런 지경에 빠졌을까.” 이 질문에서 공자는 자신이 이처럼 광야를 헤매고 있는 것은 외뿔소처럼 균형 감각이 없는 독선적인 고집을 가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호랑이처럼 분수에 넘치는 욕망을 갖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무서운 권력욕에 사로잡혔기 때문인가를 묻는 것 이었다. 이에 대한 자로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가 사람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도 우리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들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우리가 아직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로의 이 말을 들은 공자는 크게 실망한다. 공자에게 같은 질문을 받은 자공의 대답은 이러하다. “선생님의 도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너무 큽니다. 그래서 천하가 선생님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도를 약간 정도 낮추어 절충하지 않으십니까.” 이에 공자는 다시 실망을 한다. 그리고 안회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 안회의 대답은 이러하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위대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은 그 도를 계속 밀고 나가셔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다음에야 참된 군자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도가 닦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결함이요, 도가 이미 크게 닦여졌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들의 치욕일 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십시오. 받아들여지지 않은 다음에야 참된 군자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안회의 이러한 대답을 들은 공자의 모습을 ‘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처음으로 공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그리고 공자는 “바로 그대의 말 그대로이다. 안회여, 네가 만일 부자라면 나는 너의 가재 노릇이라고 할 터인데.”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해서 볼만한 인물이 바로 자공이다. 자공은 외교술에 뛰어났던 인물로 후에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인물이다. 우리 자신이 어질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광야를 해매는 것이 아니냐는 자로의 대답과는 달리 자공은 일단 스승의 도가 위대함은 인정하면서도 어찌하여 약간 낮춰서 절충하고 타협하지 않는가 하고 불만을 토론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도의 위대함은 인정하면서도 어찌하여 그것을 약간 낮추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느냐의 외교적인 논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로의 현실적 타협안은 얼핏 보면 현명한 것 같지만 실은 교묘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부정과 타락과 부패는 이런 타협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씨앗을 뿌리면 좋은 열매가 맺는 법이다. 어찌 땅이 척박하다하여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을 걱정하는가. 발로쟈가 범하는 오류가 여기서 드러난다. 발로쟈는 애당초 지금의 혼돈의 시대에서 엘레나 선생님이 가르치려 하는 정의적 사회란 존재 할 수 없으니 적당한 사회적 타협안을 찾으라고 엘레나 선생님을 회유한다. 인간의 이기심이 판치는 이 자본적 사회에서 적당히 타협하여 크리스탈 컵도 받고 어머니에게 좋은 병원도 보내드리고 엘리트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냄으로써 명성도 얻으라고 권유한다. 어차피 그 누구도 피해보지 않을 테니 선생님의 큰 뜻을 조금만 낮추어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공과 발로쟈 둘 다 외교술에 뛰어났다는 점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정치란 이처럼 타협과 절충의 속성을 띄는 것일까. 하지만 공자의 뜻을 이해한 안회가 말하였듯이 사회에서 큰 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더라고 그 것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위정자의 모습이 아닐까. 공자가 죽은 지 2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말이 여전히 성인의 말로 되새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어려움 속에서도 공자가 지키려 했던 그 높은 뜻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


 극 중 아이들은 열쇠를 찾기 위해 선생님의 집을 부수어 버린다. 벽의 경계가 허물어져버림으로써 무대와 관객석의 차이가 없어져버렸다. 거기다가 발로쟈는 툭하면 관객석에 올라오기 시작한다. 점점 더 무대와 관객석의 차이는 좁아진다. 발로쟈의 세상은 무대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객석에서 관객에게 등을 보인 채 엘레나 선생님을 향해 그녀가 지키려는 가치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역설하는 발로쟈의 언설은 관객들을 향한다. 그리고 엘레나 세르게예브나 선생님은 열쇠를 학생들에게 넘겨주고 만다. 그리고 그 열쇠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엘레나 선생님이 열쇠를 아이들에게 주었다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폐쇄된 엘레나 선생님의 집에서 벌어난 하루 밤 동안의 사건은 가치관의 진공상태가 얼마나 허무하고 파괴적이며 위태로운 것인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열쇠를 넘겨줌으로써 엘레나 선생님은 붕괴되어 버린다. 최후의 의로운 인간이라 칭송받았던 노아같았던 엘레나 선생님의 붕괴는 우리에게 극심한 허탈감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접하는 공통의 번뇌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의 도덕적 존엄성을 벗어던져버리는 순간 인간의 존재 근거는 무엇이란 말인가.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듯 난세 속에서 인간 도덕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난세의 처세술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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