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군 생활 중 내게 큰 힘이 되어준 '백범상'수상 독후감

상금 100만원, 상패, 포상휴가증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무한한 자신감을 심어줬던 '백범상' 수상의 추억. 2008년 어느 가을, 진지공사장에서 수상소식을 전해들을 때의 그 전율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벅차다. 풀이 죽어있고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보이던 그 때 '백범상'수상 소식은 내 심장을 다시 힘차게 뛰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이 글은 내게도 너무 소중한 글이다.

 

 군 생활 중 힘든시기에 내게 너무도 큰위안이 되어주신 백범선생님 감사합니다.



77연대 1대대 1중대 일병 안정기

백범일지 독후감상문 ‘민족의 스승 백범’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오히려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한 말이기도 하며 1대대 선봉 청룡 중대의 구호임과 동시에 매일 아침 크게 외치며 하루의 힘을 얻는 나의 다짐이기도 하다. 살며 겪는 그 어떠한 고통도 그것을 헤쳐 나가는 사람에게는 쇠를 달구는 담금질의 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나무는 어둠에 내딛는 뿌리의 길이만큼만 지상의 빛을 받는 줄기도 자란다고 했다. 역경의 시대일수록 그 역경은 그것을 헤쳐 나가는 위인들의 고귀한 정신을 더욱 빛나게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찬란히 빛나곤 한다. 조선 시대 말 상민의 출신으로 태어나 사형 집행 직전에 사면되기도 하였으며 옥 중 숱한 고문으로 여러 차례의 자살시도 그리고 수십 년 간의 망명 생활 뒤에 귀국한 조국에서도 민족을 위해 온 몸을 던져야 했던 백범 김구. 그에게 던져진 시대적, 개인적 고통 속에서 백범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고, 눈 덮인 광야를 처음 내딛는 심정으로 정도(正道)의 길을 걸었다.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고통에 굴복하여 변절과 타협을 택할 때 백범은 결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바꾸지 않았다. 그가 걸었던 길은 참으로 외로우며 힘들고도 험하였으리라. 비록 독립투쟁의 길이라지만 시장에서 팔고 남은 배추 겉대를 구해다 먹거나 한 끼 식사를 위해 동지들의 집을 전전해야 했던 그는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무엇보다도 가족들과 떨어져 수 십 차례의 망명 생활을 해야 했던 가장으로서 그는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죄책감을 느끼며 일제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야 했겠는가. 이러한 고통의 시대에 백범 스스로의 눈물을 먹 삼아 써내려간 것이 바로 그의 유서이자 자서전인 ‘백범일지’라 하겠다.

백범일지를 읽다 보면 그 글의 진실 됨이 느껴진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망명의 사지에서 그의 아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쓴 글 이여서 일까. 글의 내용이 허황됨이 없이 정갈한 어투로 누구나 읽기 쉽게 씌어져 있다.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를 바랐던 만큼 그는 백범일지에서 자신 삶의 행적을 그대로 들려줌과 동시에 읽는 이로 하여금 절로 스스로를 자성하게 만든다. 일지에 담겨 있는 백범의 진실한 애국심이야 말로 이 책이 갖는 힘이라 하겠다. 그 투철한 애국심은 읽는 이에게 절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준다. 또한 그의 일지 속에 녹아있는 시대적 배경은 그 자체로 훌륭한 역사적 사료이기도 하다. 백범일지는 마치 마이크로 필름이라 할 만큼 우리 근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시대적 상황, 민중의 생활, 독립투쟁의 노선 등 백범일지는 당시의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특히 백범일지에는 민족 수난기의 독립투사들에 대한 글이 많다. 어린 시절의 안중근 의사와의 만남, 임정과 다른 노선 또는 계열의 독립투사들과의 마찰 등 백범일지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활약이 기록되어있다. 무엇보다도 당 시대를 살았던 백범의 개인적 고뇌가 직접 담겨있기에 백범일지는 그 시대를 살던 독립투사들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백범일지에서는 민족 수난의 시대에 민중과 함께 살아온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백범일지가 스스로의 칭송의 글이 아닌 모든 시대를 위한 소유물로써 모든 이들이 애국심을 갖기를 바랬던 만큼 그의 글에는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느껴진다.

백범일지는 상해정부 시절 집필한 ‘상권’과 중경 시절에 쓰기 시작한 ‘하권’ 그리고 그의 건국 철학이 담긴 ‘나의 소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 하권은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독립투쟁, 통일 정부를 위한 노력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 전반을 기술하고 있다. 자신의 출생 이야기부터 개구쟁이 어린 시절, 동학 접주로서의 활동,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 황해도에서 교육자로의 활동, 처절했던 서대문 감옥 수인 생활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중국에서의 망명 정부 시절과 귀국 후에 통일 정부를 위한 활동. 이처럼 백범의 삶은 끊임없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삶이었다. 그의 출생이 심상치 않았던 것은 이러한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 이였을까. 특히 임정시절 백범이 창설한 한인 애국단의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빛나는 의거는 애국지사들의 신뢰의 극적인 합작이요 ‘육탄 십 용사’를 떠올리게 하는 숭고한 희생이었다. 백범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시계를 교환하는 장면은 살 자와 죽을 자 사이의 믿음의 의식같이 느껴진다. 살 자의 시계는 죽을 자에게, 죽을 자의 시계는 살 자에게 넘어가는 그 순간 그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진한 우정을 나눴기에 진정 행복했으리라. 백범은 가흥 등으로의 피신 생활 중에도 먼저 간 그들을 추모하며 아직 죽지 못한 자신을 탓하였다. 후일에 지하에서 만나자던 그 뜨거운 약속을 백범은 죽는 순간까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혼자 헤쳐 나가기에도 바쁜 고통의 시대 속에서도 결코 먼저 간 전우들을 잊지 않는 그의 전우애와 따뜻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무장 투쟁 노선은 ‘한국 광복군’의 창설로 더욱 갚진 결실을 갖는다. 타지에서의 오랜 망명 시절을 보내며 백범은 임시정부가 외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군대를 가질 필요성을 느꼈다. 중국 정부의 간섭으로 인해 군대를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힘들뿐더러 광복 후에도 임시정부가 국가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으려면 임정에 속한 군대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백범의 필요성에 의해 탄생한 광복군은 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 선전 포고와 버마 전선등지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광복군의 활동은 카이로 회담 등에서 비록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한국의 독립을 강대국들이 보장하게 하였다. 미래를 내려다 본 백범의 혜안이 돋보이는 결정이었다. 다만 갑작스러운 광복으로 인해 한국 광복군이 힘들게 준비해온 작전이 시행되지 못하였던 것은 백범과 광복군 스스로의 커다란 아쉬움 뿐 만이 아니라 민족의 아쉬움이기도 하다. 만일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이 성공하여 임정이 연합국 측의 인정을 받았더라면 광복 후에 남과 북의 분단이라는 현실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독립 운동가인 백범은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 수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UN으로부터 공식인정을 받았고 한반도의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는 헌법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적고 있다. 이는 백범이 끝까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지켜냈기에 가능한 일이다. 즉 임정의 정책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원칙으로 하는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공화국 설립이었다. 상민 출생으로 임시 정부의 주석이 된 뒤에도 늘 독립된 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는 자세로 초심을 잃지 않은 백범은 오로지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길을 택하였다. 임정 해체론이나 공산주의자들이 타협을 요구할 때도 그는 결코 민주주의 공화국 수립이라는 원칙을 포기 하지 않았다. 그가 철저하게 사도(邪道)를 배척하고 정도(正道)를 걸어 지켜낸 임시정부의 정체성이기에 그의 공헌은 기회주의가 판치는 오늘날 더욱 찬란히 빛나며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과연 오늘날의 우리는 얼마나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지조를 지키며 사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백범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찬란히 빛나야 마땅하다.

또한 백범은 민주주의 독립 운동가이면서도 그의 철학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문화주의, 평화사상이다. ‘나의 소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인류가 현재 불행한 이유를 인의, 자비, 사랑의 부족으로 보고 이를 배양할 수 있는 것으로 문화를 꼽았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의 모범이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우리나라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를 원했다. 우리나라의 헌법에도 국군은 국토 수호의 의무와 함께 세계 평화 유지에 기여할 것을 적어 놓았다. 지금도 세계 각국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평화 유지군들은 이러한 백범의 사상을 실현하고 있는 백범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얼마 전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연설 하였듯이 우리나라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에 걸 맞는 기여를 온 인류에게 베풀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과 함께 백범의 뜻을 쫓아 우리의 문화를 더욱 배양하여 세계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백범이 가슴에 새겼던 말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처럼 우리는 훌륭한 인격을 쌓으며 세계에 걸 맞는 훌륭한 문화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단지 겉모습만 번지르르 한 국가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문화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세계에 걸 맞는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백범 일지에서 보면‘김창수가 인천감옥에서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므로 감옥은 학교가 되었다’라고 황성신문이 보도할 정도로 백범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백범이 평생에 걸쳐 큰 관심을 가진 교육을 통해 문화는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문화는 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후세에 전달되어 그 시대에 유용하게 쓰여야 한다. 백범이 한 없이 가지고 싶어 했던 드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도록 말이다.

‘온 세상이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미망이고 덫일지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나는 그것을 내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폭력을 막기 위해 손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 아래 진정한 사티아그라하(비폭력)을 실현한 간디의 이 말은 백범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의 식민지를 겪은 인도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의 분리를 막기 위해 힘쓰다 총격을 당한 간디. 일제 통치에서 벗어난 뒤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막다 총격을 당한 김구. 비슷한 연대를 살아간 그들은 비슷하게 민족을 위해 일하다 죽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서로가 택한 길을 달랐지만 두 위인이 오늘날에도 민족의 스승이라 불리는 이유는 민족 전체의 역경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민족을 위한 정도를 걸음으로써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교훈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그 시대를 충실히 살아간 두 분 앞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이 두 인물 앞에서 부끄럽고 숙연해질 것 이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얼마나 우리가 스스로 택한 길을 묵묵히 걸어봤는지 반문해야 한다. 이러한 자세야 말로 지금은 죽어 없어진 그들의 뜻을 쫓는 우리 후세 사람들의 몫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백범의 정도를 향한 치열한 노력은 군인인 나에게 군 생활의 참 뜻을 가르쳐주었으며 군인으로서의 다짐을 굳세게 만들어 주었다. 즉 내가 성실하게 군 복무를 이행하는 것 자체로도 백범이 꿈꾸던 나라를 만드는데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방을 튼튼히 하여 조국 통일의 역군이 되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민족의 안전을 지켜 민족 문화 발달에 기여함과 동시에 세계 평화에 기여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조국의 독립, 민주주의 보장, 평화의 추구는 우리 군인들이 항상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백범의 가르침 인 것이다. 이처럼 백범의 사상은 나의 군 생활에 목적의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모든 군인들이 가슴에 담을만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군 복무를 함으로써 민족의 안녕과 더불어 세계 평화에도 기여 할 수 있다니 정말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러한 기여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 군인들은 백범을 본받아 정도를 걸어야 한다. 군인답게 성실히 군 복무를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육군 장병들이 걸어야 할 정도 인 것이다. 그 과정 속에는 역경과 고난이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그것을 참고 견뎌내어야 한다. 그러한 역경을 참아가는 과정 속에 우리는 더욱 굳세어지기 때문이다. 비록 그 고통이 죽을 만큼 나를 괴롭힐지라도 그것을 참고 넘어서는 순간 어느덧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백범이 민족의 스승으로 추앙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수형소에서의 자살충동이나 일제의 끈질긴 추격의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민족의 독립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백범이 중간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일제와 타협을 했다면 과연 오늘날 누가 백범이라는 인물을 기억해 주겠는가. 이처럼 우리는 정도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오는 고통은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 군 복무 기간은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즉 나뿐만이 아니라 성실히 군 복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든 군인 장병들은 백범의 뜻을 쫓는 백범의 제자들이다. 나에게 군 생활에서의 참 뜻을 알려주었으며 나에게 정도(正道)란 무엇인 가를 가르쳐준 백범은 나의 마음 속 스승님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스승님의 ‘문화 국가 건설론’은 앞으로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국민으로서 마음에 담을 궁극적인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에 백범일지를 읽으며 통해 너무도 큰 것들을 얻은 것 같다. 건강히 전역하여 효창원 묘소에 잠들어 계신 스승님께 꽃 한 송이 사들고 찾아 뵈어야겠다. 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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