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햄릿'을 보고
- 감상
- 2011. 11. 14. 07:03
" 새 황제에게 ‘당신’이라니, ‘황상’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는가, 형수?". -영화 야연(2006) 중 대사
허, 도련님을 도련님이라 부르지 못하고 황상이라 불러야 한다니 황후께서 어찌 난처해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원작 <햄릿>을 모티브로 한 영화 ‘야연’ 중 왕이 내뱉는 이 대사에서부터 그들의 욕망과 증오의 피 냄새가 배어나오는 듯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격언이 의미하듯이 가정은커녕 스스로의 욕망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찌 치국을 하고 평천하를 하겠는가. 결국 시작에서부터 디오니소스적 비극의 요소가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의 광기를 뮤지컬 <햄릿>은 락(Rock)풍의 클래식(Classic)과 배우들의 고뇌에 찬 연기를 통해 거침없이 발산해 버린다.
갈릴레오와 같은 해에 태어나고 세르반테스와 같은 해에 죽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소산물이다. 작품 속의 포인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감성과 광기의 난동 질이다. 4명의 복수의 아들들(햄릿, 레어티즈, 클로디어스왕, 노르웨이왕자[뮤지컬에는 안 나오지만])의 광기와 2명의 사랑의 희생녀들(오필리어, 거트루드 왕비)의 슬픔을 둘러싼 이야기는 인간이 삶과 죽음사이에서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렇듯 작품은 르네상스라는 특수한 시대배경에서 태어났지만 인류 역사의 보편성을 꿰뚫는 인간의 본질을 보고 있다. 뮤지컬은 특히나 사랑에 방점을 찍어두고 이야기를 노래한다. 거트루드 왕비를 사랑하기에, 그리고 얻기 위해 형까지 암살해야 했던 클로디어스왕, 아버지의 원수이자 사랑의 대상인 햄릿의 존재에서 오는 괴리감에 미쳐버린 오필리어. 이들의 광적인 사랑을 배우들은 감미로우나 고뇌에 찬 대사로 읊조린다. 그들의 대사는 선과 악의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선과 악의 모호한 실체를 드러나게 한다. 또한 배우들의 진지하고 어딘가 슬픔을 간직한 듯한 연기는 극 중의 가짜와 진짜 광기, 이성과 감성의 구분을 어렵게 만든다. 이로 인해 무엇이 허구이며 실재인지에 대한 구분조차도 어려워진다. 이는 현실 속 우리의 모습 속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요소가 아닐지 싶다. 그러기에 우리는 햄릿의 고뇌와 폭풍 같은 방황을 쉽게 공감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사 부분에서 다소 아쉬운 점은 뮤지컬 속의 대사는 노래와 결합되어야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극 작품 <햄릿> 속의 주옥같은 명대사들이 대거 빠져있어서 원작의 감동을 그대로 전해주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했다.
르네상스 이후 물음표와 느낌표의 대상은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겨 져갔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고뇌에 찬 이 독백은 햄릿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햄릿은 물론 관객들에게도 셰익스피어가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이번 뮤지컬에서 이 대사가 등장하지 않아 아쉬움이 컸었으나(혹은 필자가 잠시 딴 생각하다 놓쳤거나) 복수와 어머니에 대한 연민 속에서 갈등하는 뮤지컬 속 햄릿과 그 주변 사람들 간에 벌어지는 비극의 불협화음은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회의적이고 사색적인 사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햄릿. 이번 뮤지컬에서는 이러한 햄릿을 활자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대상으로 볼 수 있어서 다이나믹 버젼의 <햄릿>을 읽은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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