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과학과 사회적 책임의 관계

2006.12.12 17:43에 작성된 글입니다.

오펜하이머 [Oppenheimer, Julius Robert, 1904.4.22~1967.2.18]

수천 개의 태양이 한번에 폭발해 그 섬광(방사능)이 전능한 하느님의 영광인 하늘로 날아간다면…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다.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면서)
-오펜하이머(1904~1967) : 미국 핵물리학자, 맨해튼 계획 책임자-

 

오펜하이머. 그는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을 주도했습니다.
맨해튼 계획(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루어진 미국의 원자폭탄제조계획)에는 내로라하는 4천5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아인슈타인의 건의로 시작) 아마 독일, 일본, 이탈리아를 비롯한 이차대전 동맹국을 제외한다면 전 세계 유명한 물리학자, 화학자들은 전부 참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 동맹국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한 뒤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페르미가 대표적이지요.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사막에서 역사적인 첫 핵실험이 실시됐습니다. 실험이 성공하는 모습을 본 오펜하이머는 그 위력에 놀라 정신을 거의 잃은 채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이 세상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을 알았다).” 부연 설명하자면 핵폭탄의 발명으로 이제 지구는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죠.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운명의 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어 반경 3km이내가 쑥대밭이 됩니다. 그리고  3일 후인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핵폭탄이 투하됩니다.

일본에서는 수십만명이 핵폭탄에 의해 죽게 됩니다.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했고, 이로써 2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 맨해튼 계획의 대장정이 막을 내리고 미국과 영국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기쁨에 젖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유명한 영웅이 됩니다. 잘 알려진 대로 오펜하이머는 일본에 두 개의 핵폭탄이 떨어진뒤 죄책감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핵폭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내 손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트루먼 대통령은 주위 참모들에게 “다시는 저 얼간이를 내 옆에 오지 못하게 해”라면서 화를 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로스 알라모스 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 고등과학원(IAS) 3대 원장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 수년간을 핵물리학 연구보다 지식윤리와 도덕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이에 대한 글을 많이 썼습니다. 1967년, 식도암으로 세상을 하직합니다.

 

현대 과학시대에서 과학자 한명의 힘은 엄청나게 큰 것 같습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존재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이끄는 히틀러의 우라늄 계획이 성공했었다면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 제2차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맨해튼 계획이 없었다면 ,아인슈타인이 없었다면 지구에 지금 원자폭탄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맨해튼 계획때문인지는 몰라도 오펜하이머 그는 나중에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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