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학] 한 개인의 입장으로서의 역사 보기

역사란 빌딩처럼 한 번에 허물고 새로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제와 오늘이 중첩되고 오늘이 내일과 중첩되며 쌓여가는 어느 퇴적층 같은 것이다. 시간이 흘러간 과거의 층에는 살점을 잃은 백골들로 가득할 것이며 그 보다 오래 된 것들은 그 뼈마저 사라져 화석으로 흔적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혹은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지하로 들어가 그들의 흔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백골에 다시 살점을 입혀 그들이 겪은 고민과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란 죽은 자들에 대한 추모가 아닌 산 자들을 위한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한 개인의 입장으로서 역사를 보게 된다.

 

이인호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이인호 선생님의 수업은 마치 한 편의 소설과 같다.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오신 어느 한 분으로서의 증언과도 같다. 선생님께서 보고 들으셨던 이야기, 직접 보셨던 이야기, 공부하셨던 이야기, 고민하였던 이야기들이 한국의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순간과 interlocking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았던 개개인들을 그 당시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 해석하게 된다. 그 당시 살았던 사람의 관점에서 그 시대를 들여다 본 다는 것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쓰는데 필요한 공감과 서사를 필요로 한다. 아니 어쩌면 내 마음 속에 역사 속 인물들을 위한 개개의 박물관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 문화, 풍습, 의식주 등을 복원하여 그들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리고 이럴 때 그들의 삶이 한 개인의 삶으로서 입체감을 가지고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이인호 선생님께서 러시아에 계실 때 지난 사료들을 조사하다 마음이 찡하였던 적이 있었다 하셨다. 러시아 니콜라이의 황제 취임식과 관련된 자료 속에 조선의 자료가 있어 신기하여 보셨다고 한다. 거기에는 1896년 민영환 선생(당시 러시아 황제의 취임식에 특사로 파견됨)에게 고종 황제가 부탁하였던 것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황제의 취임식 어떤 선물이 적절한지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민영환 선생이 귀국할 때 가져올 것을 고종 황제가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안경, 망원경, 권총, 농기구였다. 왜 하필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것들 일까 이인호 선생님께서는 생각해보셨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 아관파천으로 왕궁을 떠나 있던 고종 황제로서는 호신용으로서의 권총 그리고 잠시라도 바깥 세상을 보고자 망원경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농업국가였던 러시아의 농기구를 직접 봄으로써 우리나라의 농기구 개량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해보셨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고종 황제를 구한말 나약하고 의지가 부족했던 인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시 열강들의 침략과 혼잡한 국내외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종 황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카드는 과연 몇 개나 되었을까. 일년 사이 외무부 장관을 수 차례 바꾸고 세계 여러 곳에 외교 사절을 보내고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는 등 그는 그 시대의 소용돌이를 최대한 뚫고 가려 했던 가장 절박한 사람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수업 중 불현듯 한쪽 눈을 가리고 망원경을 통해 공사관 밖을 내보고 있는 고종 황제가 눈앞에 보이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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