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단상

자전거 단상

결국 네 번째 자전거마저도 떠나가버렸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세 번 자전거를 (기차역, 집 앞 심지어는 학교 안에서도!)도둑맞았고 한 번은 필치 못한 사정으로 자전거를 포기해야 했다. 자전거의 나라 네덜란드에 사는 사람치고 자전거에 관한 에피소드 없는 사람 있겠냐 만은 네 번째 자전거 마저 잃게 되자 어찌나 분하고 허망하던지. 이 곳에서 나는 지지리도 자전거랑은 연이 없구나 생각하지 안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분해서 씩씩대다가 결국에는 자전거를 다시는 안 사고 그냥 앞으로 먼 거리든 가까운 거리든 걸어다니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어쨌든 그날 저녁 클라이밍 약속이 친구와 있었고 자전거로 20분이면 갈 곳을 이제는 걸어서 한 시간이 걸려 가야 했다(왕복으로 치면 2시간!). 어쨌든 늦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왔고 기왕이면 걷기 좋은 루트를 짜야겠다 해서 Avenue Concordia를 지나 호수공원을 거쳐 가는 길을 택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는 자전거를 타지도 않았고 타고 싶지도 않았다. 난 원래 걷는 것을 좋아했고 걷는 것 예찬론자였으니까. 하지만 이 곳 네덜란드에서는 자전거도로와 인도가 붙어있는 구조인지라 걷다 보면 수 많은 자전거들이 나를 추월해 간다. 나를 추월해 가는 자전거들의 뒤꽁무니를 멀끔이 쳐다 보면 뭔가 뒤쳐진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네덜란드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전거 없이 터벅터벅 걷다 보면 느릿느릿 거북이가 걷다가 깡총깡총 지나가던 토끼에게 추월 당하는 느낌이었다. 결국 이 곳에 처음 도착한지 한 달도 채 안되어 나는 자전거를 샀고 끊임없이 자전거를 도둑맞아도(나쁜 자전거 도둑놈!! 내 자전거 내놔!) 자전거의 편리함과 신속성 그리고 누구나 사용하는 걸 나는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자격지심에 다시 자전거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매력적인 운송수단을 잃어버린 탓에 허망한 마음으로 Avenue Concordia의 저녁을 걷는데 이제껏 자전거를 타고 지나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주택 반 지하에서 온 가족이 말끔한 주방의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커다란 네덜란드 창문 안으로 보이는 레코드판으로 가득 차 있는 책장의 거실, 집집마다 그 가족의 특징이 보이는 제 각각의 데코레이션들, 길거리에서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이른 저녁 Avenue Concordia를 걸으며 본 모습은 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던 그 거리와는 또 다른 거리처럼 느껴졌다. 자전거에서 내리니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더라.

 

요즘 세상의 화두는 당연히 속도의 시대이다. 이 세상은 더 이상 느리게 가는 것을 좋아하지도 권하지도 않는다. 스마트폰과 각종 IT기기들을 쓰지 않은 사람은 시대에 뒤쳐지는 사람이 되는 세상, 뒤쳐진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세상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재빠르게 오늘의 날씨, 페이스북, 트위터, 이메일 등을 확인하고 아침을 먹으며 네이버 첫 화면의 뉴스들을 보는 것은 이제 어느 바쁜 CEO의 모습이 아닌 대부분 사람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이제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속도의 차이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과 걷는 사람의 차이가 아니라 자동차를 타는 사람과 걷는 사람 이상의 차이로 그 보폭의 넓이가 더 커져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어느 본부장은 시사 티비에 나와 그러더라, 스마트폰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많은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얻을 수 있게 되고 그것은 잘못된 의사결정을 줄여줌으로써 결국에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거라고. 스마트폰을 쓰는 스마트한 사람에 비해 그렇지 않은 사람은 퇴화까지는 아니 여도 결국에는 뒤쳐지는 것이라고. 맞는 말이긴 하다. 스마트 시대에 보폭을 맞추어 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사이에 어찌 차이가 없겠는가. 하지만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하여 목적지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보지 못하였던 것들 느끼지 못하였던 것들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시간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걷는 것은 가장 정직한 운동이고 가장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운동이며 온전히 내 몸을 이용하여 걷는 자체 운동수단이자 운동이고 가장 여유로운 운동이다. 인간 스스로의 정보처리 능력과 사고능력도 마찬가지이다. 스마트폰을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나도 스마트폰 유저이고 스마트폰을 사랑한다). 다만 거기에 모든 정보처리 능력과 사고능력을 전적으로 매달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모두가 조그마한 스크린을 쳐다보느라 보지 못하는 것들, 보려 하지 않는 것들, 지나쳐버리는 것들 있음을 자각하자는 것이다. 내 몸 자체를 온건히 사용하여 통찰하고 사고하는 가장 원시적이고 여유로운 삶이 가지는 가치와 혜안은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가 나일까 생각한다. 그저 이 글은 허겁지겁 달려가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자고 내 스스로에게 하는 혼잣말이자 그저 한번 중얼거려보고 싶은 자전거를 잃어 버린 것에서 얻게 된 산보散步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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