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1편)-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표류한 네덜란드인은 조선에 하늘이 준 기회였다

 

 

며칠전인 8월 15일은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한지 36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당시 조선 시대 사람들의 눈에 비친 네덜란드인은 어땠을지 그리고 이러한 접촉은 조선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이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조선왕조실록에서 네덜란드와 관련된 사건들을 뒤져보았다. 훈련도감, 비변사 기록 등에도 조선 시대 네덜란드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그럴 경우 글이 지나치게 방대해지므로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작성하도록 하겠다.


한반도에 표류한 최초의 네덜란드인인 박연(朴淵)이 조선에 도달한 17세기는 네덜란드의 황금기로 불리는 시기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이미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강력한 해상권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수리남 등 본토의 수십 배에 달하는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철학, 예술, 과학 등에서도 황금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당시 세계 문명사적으로 최첨단의 사회를 살아가던 네덜란드 사람들과 조선사람들과의 만남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들은 조선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 사람들은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그 당시 일본에서의 네덜란드와의 개항은 어땠고 이것이 일본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1. 검색키워드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 네덜란드와 관련되어 검색한 키워드는 다음과 같았다.



박연, 하란(荷蘭), 남만인 (南蠻人), 아란타(阿蘭陀), 조총, 홍이포, 오보야고, 마삼브로


이 중 하란, 남만인(포르투갈 등 유럽인을 지칭하는 경우에 쓰이기도 하였다), 아란타는 그 당시 네덜란드인을 일컫는 단어였다또한 그 당시 외국인에 대한 조선의 풍습을 알아보기 위해 오보야고와 마삼브로가 키워드로 검색되었다.

 



2. 외국인에 대한 조선시대의 개방성

 

본격적으로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조선시대에서의 외국인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외국인에 대한 조선의 정책이 어땠는지를 알면 그들의 삶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잠시나마 지금의 우리의 외국인에 대한 개방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3년 현재 국내 체류 외국인의 수가 150만명이다. 이는 10년 새 두 배로 증가한 숫자이며 전체 인구의 3%에 달하는 수치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외국인의 유입 숫자수의 증가는 가속화 될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외국인의 수용에 대해서는 비개방적인 태도에 가깝다. 여전히 외국인은 외국인일 뿐이라는 시선이 강하며 혼인, 직업, 문화 등에 여전히 편견과 오해가 많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인 조선사회에서 외국인에 대한 태도는 어떠하였을까?


조선의 대외관계는 동아시아 지역을 근간으로 국한되어있었다. 따라서 주 대외 간계는 중국과 이루어졌으며 교린 관계를 유지했던 일본인과 유구인(오키나와) 정도였다. 하지만 실록을 잘 찾아보면 몽골인, 위구르인, 이슬람인, 태국인, 자바인, 흑인 그리고 네덜란드인 등까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을 찾았던 외국인들 중에는 귀화해서 조선인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향화인(向化人)이라 불리었다. 귀화한 사람에 대해 조선 정부의 정책을 살펴보자.

 

세종 20(14381 28)

 

귀화한 여진인에게 양부(良夫)에게 시집가서 낳은 여자를 주도록 하다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귀화(歸化)하여 온 여진 사람 시가로(時家老)와 야질대(也叱大) 등에게 의복·갓·양식·가사·가재·안장 갖춘 말·노비를 주고, 인하여 공사비로서 양부에게 시집가서 낳은 여자에게 장가들어서 아내로 삼도록 하며, 금후로는 귀화한 사람으로서 장가들 자가 있으면 으레 양부에게 시집가서 낳은 여자를 주도록 하는 것을 영구히 항식으로 삼으소서.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여기에서 보이듯 외국인들 중에서 장가가기 원하는 사람은 양인 계급의 여성과 결혼 하는 것을 허락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15(1435 115)

 

광주 이간의 양자가 된 향화인 왜인 마삼보로의 과거 응시를 허락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향화(向化) 한 왜인 마삼보로(馬三甫老)가 광주 호장 이간(李間)의 양자(養子)가 되어 성을 이씨로 가칭하고는 양주(楊州)의 호장 한원(韓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이근(李根)을 낳았사온데, 근이 글을 읽어 이제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청하옵건대, 그의 응시를 허용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여기에서 보여지듯 귀화한 외국인이 일정한 학문 경지에 이르면 과거에 응시가 가능했었던 것 또한 알 수 가 있다.


 

3. 조선에 표류한 두 네덜란드인

*박연(얀 야스 벨테브레)과 하멜을 구별하며 글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간혹 인터넷에 이 둘을 혼동하여 올리신 분들이 많습니다.


드라마 '탐나는 도다'는 네덜란드인 하멜을 소재로 하였으나 정작 드라마 속 금발의 푸른눈 사나이는 영국인으로 그려진다.


2009년에 MBC에서 탐나는 도다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탐라의 해녀와 표류된 푸른 의 청년 월리엄 사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 이 드라마는 1653년 제주도에 표류했던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를 모티브로 하였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이 있으니 그 이름은 얀 야스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 생몰년도 미상, 한국 이름은 박연, 1627년에 조선에 표류)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조선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왕조 실록을 통해 그들의 삶을 추적해보자.


 

인조 26 (1648 8 25

 

정시를 설행하여 문과에 9, 무과에 94인을 뽑다

정시(庭試)를 설행하여 문과에 이정기(李廷夔) 9인을, 무과에 박연(朴淵) 94인을 뽑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박연(朴淵)은 두 번 언급된다. 그 중 첫 번째인 인조실록 26년을 보면 무과에 박연(朴淵) 94인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1627년 네덜란드에서 나가사키로 가던 중 제주도에 표류한 얀 야스 벨테브레의 한국 이름이 바로 박연이다. 조선에 표류한 최초의 네덜란드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는 조선에 귀화하여 무과에 뽑히고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외국인이지만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에 사는 동안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1 1녀를 나았다.

 

탐나는 도다에서의 박연(로버트 할리가 역을 맡음)



효종 11(1653 8 6)

 

제주 목사 이원진이 난파당한 서양인에 대하여 치계하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 용뇌(龍腦) 4(), 녹비 2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효종 11년 기록에 두 번째로 박연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동인도 회사에서 일하던 하멜은 1653상선 스페르웨르(Sperwer) 호를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게 되었는데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은 하멜 일행을 체포하여 감금하였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이들이 어디 국적의 사람인지 한참 동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박연을 불러다 이들과 통역을 하도록 하였다. 사실 박연은 이 당시 조선에 산 지가 오래되어 본디 모국어였던 네덜란드어를 거의 잊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다시 네덜란드어를 생각해냈고 이들이 네덜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던 중 표류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날짜의 효종 실록 부분 중 재미있는 부분은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인가?’라고 묻자 네덜란드 사람들이 야야하며 대답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어로 JA’그렇다 Yes’의 의미이다. 또한 이들이 화포를 잘 다룬다 하여 금려(禁旅)에 편입을 시켰다 하였는데 금려란 국왕 호위군을 뜻한다. 아마도 훈련도감의 박연 밑에서 포수로 임명 된 것을 말하는 듯 하다. 바로 이들이 앞에서 잠시 언급한 하멜 일행이다.


 

효종 6(1655 4 25)

 

남만인 30여 인이 표류하여 제주에 이르러 목사 이원진이 잡아서 서울로 보내다

당초에 남만인(南蠻人) 30여 인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이르렀으므로 목사 이원진(李元鎭)이 잡아서 서울로 보내었다. 조정에서 늠료를 주고 도감(都監)의 군오(軍伍)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 남북산(南北山)이라는 자가 길에서 곧바로 하소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청사가 크게 놀라 본국을 시켜 잡아 두고 기다리게 하였다. 남북산이 애가 타서 먹지 않고 죽었으므로 조정이 매우 근심하였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끝내 묻지 않았다.


하멜 일행은 조선에 뿌리 내린 박연관는 달리 조선 사회에 정착하지 못했다. 결국 하멜의 일원 중 남북산이라는 자가 1655년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 앞에서 자신들을 조선에서 구해줄 것을 선처하는 호소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결국 호소를 한 그는 감금됐고, 그 곳에서 사망했다.


효종 7(1656 10 23)

 

동래 부사 안진이 치계하여 표류 아란타 군민에 관련한 서계에 대한 일을 아뢰다

동래 부사 안진()이 치계하여 아뢰기를,

“차왜(差倭) 귤성진(橘成陳) 등이 은밀히 역관들에게 말하기를 ‘10여 년 전에 아란타(阿蘭陀) 군민(郡民) 36명이 30여 만 냥()의 물건을 싣고 표류하여 탐라에 닿았는데, 탐라인이 그 물건을 전부 빼앗고 그 사람들을 전라도 내에 흩어 놓았다. 그 가운데 8명이 금년 여름에 배를 타고 몰래 도망와서 강호(江戶)에 정박했다. 그래서 강호에서 그 사건의 본말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서계(書契)를 예조에 보내려 한다. 아란타는 바로 일본의 속군(屬郡)으로 공물(貢物)을 가지고 오던 길이었다. 황당선(荒唐船)이 표류해 오면 즉시 통지해 주기로 전에 굳게 약속하였는데, 지금 통지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억류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성실하고 미더운 도리인가. 차왜가 나오면 반드시 서울에 올라가 서계를 올릴 것인데, 본부(本府)와 접위관(接慰官)의 문답이 예조가 답한 서계와 다르지 않아야 일이 어긋나는 단서가 없게 될 것이다. 또 도주(島主)와 강호의 집정자 사이에 틈이 있는데, 이번 일은 매우 중대하여 만약 서로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도주가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앞의 사건 후에 전라도에 유배됐던 하멜 일행은 13년여 만인 1663년 조선을 탈출했다. 일본 히라도로 넘어간 이들은 다시 나가사키로 갔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이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 바쿠후에 전해져 조선에 남아있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석방 교섭이 진행되었다. 조선 정부는 당시 일본과의 마찰을 많이 부담스러워 했음을 이 당시 여러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조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은 우리나라에는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를 발표하였다. 사실 그가 이 보고서를 작성한 이유는 자신과 동료가 14년간 조선에 억류되어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함이였다. 이 보고서는 유럽에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알린 최초의 보고서가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직접 교역을 위해 1000톤 급의 선박인 코레아 호를 건조하였으나 일본 바쿠의 반대로 조선과 교역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멜 표류기는 하멜이 그 동안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는 왜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들이 당시 조선에 하늘이 준 기회였을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기술해보겠다.


클릭 :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2편) -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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