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2편)-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 일상
- 2013. 9. 3. 00:15
이 글은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1편)-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에 이어 쓰는 글 입니다. 앞의 글을 안 보신 분들께서는 위의 링크를 눌러주세요.
표류한 네덜란드인은 조선에 하늘이 준 기회였다
4. 신무기를 개발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조선에 표류하였고 어떤 이는 여기에 잘 정착하였고 어떤 이는 여기에 떠났다는 역사적 사실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조선 사회에 어떠한 기여를 하였는가를 알아보는 일 또한 중요하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왜구 조총의 위력을 실감하였으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가진 홍이포가 가진 전술적 파괴력에 놀라있었다. 과연 이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조선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효종 7년(1656 7월 18일)
새로운 체제의 조총(鳥銃)을 만들다
새로운 체제의 조총(鳥銃)을 만들었다. 이보다 먼저 만인(蠻人)이 표류하여와 그들에게서 조총을 얻었는데 그 체제가 매우 정교하므로 훈국(訓局)에 명하여 모방해서 만들도록 한 것이다. |
박연이 표류하던 배에는 그외에도 다른 2명의 네덜란드 인(히스버츠, 버파스트)들이 있었다. 이들 역시 조선 사회에 적응을 해나갔다. 당시 이들은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들은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의 제작법, 조작법을 조선군에게 지도하였다. 또한 이들에 의해 당시 조총의 개발법 또한 발전 되었을 것이라 추측 된다. 이 세 사람은 병자호란에 출전하였으며 박연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전쟁 도중 전사하였다.
효종 7년의 기록에는 새로운 체제의 조총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새로운 체제의 조총이 하멜 일행의 도움을 받아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북벌론을 강하게 주장하던 효종 당시에는 신기술 개발에 대한 의지가 높았으며 네덜란드 사람들의 지식을 적극 활용하여 효종은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어쩌면 이 당시 하늘은 조선에 네덜란드인이라는 선물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선물을 잘 사용할 수 있을지는 당시 조선인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인조 15년(1637 1월 22일) 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도(江都)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허세로 떠벌린다고 여겼으나 제로(諸路)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유수(留守) 장신(張紳)에게 통솔하도록 명하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배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연미정(燕尾亭)을 지켰다.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에서 배를 정비하였는데, 장비(裝備)를 미처 모두 싣지 못했다.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 (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강진흔·김경징·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장관(將官) 구원일(具元一)이 장신을 참(斬)하고 군사를 몰아 상륙한 뒤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장신이 깨닫고 이를 막았으므로 구원일이 통곡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 |
하멜이 표류하기 이전의 일인 병자호란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자. 청나라의 홍이포(紅夷砲)에 의해 당시 조선군이 굉장히 고군분투 하는 모습이 보인다. 김훈의 '남한산성' 책을 보더라도 당시 홍이포에 의해 조선군이 어느 정도로 전략적으로 제한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홍이포는 1604년 명나라 군대가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른 후 네덜란드인들이 쓰던 대포의 파괴력에 크게 압도되어 수입하고 복제한 대포를 말한다. 그들이 이 대포를 홍이포라 부른 이유는 그들이 네덜란드인을 홍모이(紅毛夷), 즉 붉은 머리를 한 오랑캐라 불렀던 데서 유래했다. 청군은 1621년에는 홍이포를 복제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안에 갇혀 있던 조선군은 이 홍이포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는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홍이포를 정식으로 들여오게 되며,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박연)과 그의 동료들인 히아베르츠, 피아테르츠 등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선군에게 홍이포의 제작법과 조종법을 가르쳤다.
5. 당시 일본에서의 네덜란드인
조선과 네덜란드인의 인연이 이러했다면 같은 동아시아 지역인 일본에서는 어떠했을까?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대 말까지 일본은 쇄국정책을 펴 서양인들이 자국 땅에 발을 못 붙이게 했다. 그러던 중 1543년 태풍에 떠밀려 일본 땅에 닿은 포르투갈 상인들을 계기로 서양인과 일본인 사이에 첫 직접 접촉이 일어났다. 하지만 일본은 나라 문을 닫았다. 막부 입장에서는 유럽인들의 기독교 전파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나라 중 막부가 인정한 유일한 예외가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 나라들의 상인과 달리 교역 대상지에서 선교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런 네덜란드 상인들을 위해 막부는 1641년 나가사키 앞바다 섬에 조차하도록 허가했다. 네덜란드 선박은 이 섬에만 접안하고, 거류민도 이 섬에만 거주한다는 원칙이었지만 허락을 받아 거류민이 섬 밖 육지로 나갈 수도 있었다.
다른 유럽 나라가 모두 배제됨으로써 네덜란드 상인에게 일본은 200년 이상 독점할 수 있었다. 조차가 허락된 지역에는 의사가 상주했는데 이 의사는 섬의 몇 안 되는 거류민을 진료하는 역할 말고도 과학자 겸 지식인으로서 일본 문물을 탐구하는, 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의사들 중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시볼트(Philipp Franz Jokheer Balthasar van Siebold 1796~1886)이다. 시볼트는 한 지방관리의 병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용한 양의사’란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섬 밖에서의 지방민 진료를 허락 받았으며 일본인 50명을 학생으로 받아 의료학교까지 개설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시볼트로부터 의술뿐 아니라 서양에 관한 전반적 지식을 전수 받았다. 그 시절 일본에서 서양 문물에 관한 공부를 ‘란가쿠(蘭學)’라 불렀다. ‘화란(和蘭, 네덜란드)’에 관한 학문이란 뜻이다. 이 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함대의 위세에 놀라 일본은 개항을 하였다. 당시 페리 제독은 시볼트로부터 일본에 관한 여러 지식을 조언 받은 터라 일본의 문호를 쉽게 열 수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이미 서양 문물을 부분적으로나마 접해본 터라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에 비해 문호를 일찍 개방하였고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6. 결론
조선인이 된 박연은 조선의 병기개발과 개량에 커다란 역할을 다하고 있었으나 그가 참가하고 있던 병기 개량에 의한 군사 기술의 축적은 효종의 붕어와 함께 빛이 바랬다. 그것은 효종의 붕어에 따른 북벌운동의 침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북벌정책보다 국내적 안정을 지향하게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재정난과 파벌 경쟁, 그리고 군신간의 불화가 겹쳐짐에 따라 군비 증강에 힘을 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병기개발에 대한 조선의 무관심은 결국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국방을 위한 신기술에 의한 병기개발은 물론, 기존의 병기에 대한 관리조차도 태만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병기에 대한 개량과 신병기의 개발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서양과 그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 비해 조선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격차를 보이며 뒤떨어지게 되었다.
17세기 당시 최신의 신기술을 가진 네덜란드인의 조선으로의 표류는 조선이 서양에 비해 뒤떨어진 격차를 따라 잡을 수 있는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기술과 지식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조선 국왕과 신료들의 중화사상 및 국제현실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친 격이며 국가적인 기회 상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이 17세기 네덜란드인과의 조우를 계기로 넓은 세상에 눈을 뜨고 미래를 준비했더라면 그 후 조선의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특히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상관을 허락하고 왕성한 무역 과정 속에 발빠르게 세계정세를 판독한 일본과 조선을 비교하면 한국과 일본의 운명이 17세기 나가사키에서 갈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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