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의 끝나지 않은 꿈 그리고 워싱턴 대행진 50주년
- 일상
- 2013. 9. 16. 14:02
미국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곳에서의 인종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865년 American Civil War을 통해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지 150여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백인과 흑인 간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긴장은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된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명백히 존재한다. 특히 지난 6월 25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소수 인종 투표권 보호를 위해 제정됐던 ‘투표권법’(Voting Rights)의 핵심 내용에 대해 부분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그 갈등은 흑∙백의 갈등을 넘어 백인과 소수 인종 간의 갈등으로 표면화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지난 7월에 지난해 비무장 흑인 소년 트레이번 마틴(Trayvon Martin)을 총격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조지 짐머만(George Zimmerman)이 정당방위로 무죄판결을 받으며 인종차별과 과잉 정당방위에 대한 문제로 격한 인종갈등 시위로 번졌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한동안 큰 진전을 이루어 오던 인종간의 화합과 조화는 지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경제적 문제를 계기로 다시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난 8월 28일 미국은 마틴 루터킹(Rev. Dr. Martin Lutehr King)의 1963년 워싱턴 대행진 50주년(50th anniversary of the March on Washington)을 맞이 하였다. 우리에게도 익히 ‘I have a dream’으로 잘 알려진 마틴 루터킹의 연설은 바로 50년 전의 그 날 링컨 메모리얼(Lincoln Memorial)에서 흑인 차별 철폐를 외치며 25만 명의 관중 앞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이를 기폭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미 의회는 투표, 교육, 고용, 거주 및 공공 시설 등에 있어서 흑인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그 성과를 미쳐 어느 정도 보기도 전에 킹 목사는 1968년 암살 되었다. 그가 바랐던 세상은 1963년 그의 연설에서 잘 나타난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부모의 후손과 그 노예의 주인이 낳은 후손이 식탁에 함께 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무엇보다도 마틴루터킹(Martin Luther King)의 연설 중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이 그들의 피부 색깔이 아닌 그들의 자질로 평가를 받는 나라에서 사는 것 입니다)”는 “all men are created equal”이라는 미국 건국의 정신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킹 목사의 연설에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인종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그의 연설은 당시에 인종 간의 화합을 이끌어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50주년 행사가 이루어 지던 이 날, 워싱턴의 하늘은 회색 빛 구름으로 가득했으며 이슬비가 종일 내렸다. 하지만 이에도 불구하고 인종을 초월한 수십만 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이 날 출근길에 Union Station을 지나며 보니 이른 아침부터 마치 50년 전을 재현하듯 미국 전역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워싱턴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링컨메모리얼에서는 오전부터 사회 각계 각층의 유색 인종, 성적 소수자, 사회적 약자 들을 대변하는 대표들 수십 명이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연설의 마지막 즈음에는 마틴 루터 킹의 아들과 딸 그리고 전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의 연설이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연사자로 오바마 대통령이 마틴루터킹 목사가 섰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올라섰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재선이 된 그가 이 자리에 서는 것 자체가 미국 역사에 있어서도 큰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25분여간 이어진 그의 연설은 인종차별 폐지를 위해 투쟁한 모든 혁명가들의 과정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미국의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며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꿈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 되리 라는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었다. “Because they kept marching, America changed. Because they marched, a civil rights law was passed. Because they marched, a voting rights law was signed. Because they marched, doors of opportunity and education swung open so their daughters and sons could finally imagine a life for themselves beyond washing somebody else’s laundry or shining somebody else’s shoes. Because they marched, city councils changed and state legislatures changed and Congress changed and, yes, eventually, the White House changed.”
지난 50년간, 미국은 그 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바뀌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마시는 것부터 교육 받는 것까지 격리되고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흑인 여성의 직업의 60%가 백인의 가정에서 하인을 하는 것이었다. Jim Crow 일행은 투표 등록을 하러 가기 위해 린치를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지금, African-American들은 그 어느 다른 인종들 보다 투표를 적극적으로 한다. Massachusetts의 주지사도 흑인이며 오바마는 두 번이나 당선되었다. 마틴 루터 킹이 살았던 시대에는 다른 인종간의 사랑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미국 시민 중 초혼의 15%가 다른 인종간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흑인 남성의 경우는 그 중 24%이다. 마틴루터킹이 살았던 시대에는 segregation이 남쪽에서는 합법이고 북쪽에서는 일상적이었으나 이러한 segregation은 미국 주요 85개의 도시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금은 흑인 주지사, 경영자, 배우들을 보는 게 전혀 낯설지 않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흑인들의 경제적 진전은 궁지에 빠졌다. 2000년과 2011년 사이 흑인 가정 소득의 중앙값은 백인에 비해 64%에서 58%로 떨어졌다. 프라임모기지 사태 이후에는 주택 시장의 거품이 터지면서 대출을 해서 집을 빌렸던 흑인들에게 그 불똥이 그대로 튀었다. 2005년에는 백인 가정의 순자산액의 중간값이 흑인에 비해 11배였으나 2009년에는 20배로 늘어났다.
이러한 불평등은 경제적 여건뿐만이 아니라 교육 여건에서도 여실히 들어난다. 평균 흑인 17세의 가독 능력과 연산능력은 백인의 13세 수준에 머물고 있다. 30~34세 사이의 흑인 10명 중 1명은 감옥에 있다(백인은 61명 중 1명 꼴로 있다). 1960년 당시에는 흑인 아이들의 25%만이 부모가 미혼 상태였지만 지금은 75%가 부모가 미혼인 상태에서 태어난다(백인은 29%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대게 미혼모 혼자에게서 양육된다.
이러한 이유로 racisim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종차별은 감소하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기업들은 피부색깔보다는 능력을 먼저 보고 사람을 채용하며 점차 더 많은 흑인들이 미국 사회의 주류로 편입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확실히 이전 세대들보다 인종차별 적인 요소가 덜하며 흑인 여성 대학 졸업자의 평균을 보면 백인 여성 대학 졸업자의 평균과 별 차이가 없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정규직을 가지고 21세 이후에 결혼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중 단지 2%만이 빈곤층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수의 흑인들은 여전히 이 세가지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자유민주국가이며 자유시장경제체제의 미국에서 개인의 운명은 우선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전해져 여전히 존재하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인종차별은 지금도 적다고만 할 수는 없다. 이러한 흑인의 경제적 열악한 상황은 기술의 발전과 조기 교육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점차 더욱 심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빈곤이 빈곤을 양상하며 전과 경력 등은 이후 결국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인종차별의 결과라고만 할 수는 없다. 흑인 학생들 사이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흑인 학생들 사이에서 존중보다는 ‘백인을 따라 한다’는 냉소의 대상이 되고 공부를 안 하는 것이 진짜 흑인이라 생각하는 이러한 문화는 흑인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문화는 public school가 아닌 private school에서는 훨씬 덜 하기에 흑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 해서든 좋은 사립 고등학교에 보내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의 선택권은 곧 시민권의 투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적, 정책적 지원을 하는 것이 도움은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바마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롤모델들이 끊임 없이 흑인 사회에 이상향을 제시하고 그들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흑인에 대한 법적인 차별은 50년 동안에 사라졌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 추구권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economist 참조).
인종간의 갈등은 지구 최대의 멜팅팟(Melting Pot)인 미국 사회가 앞으로도 가져가야 할 과제임에는 틀림 없다. 토크빌은 이미 1830년대에 인종 차별주의를 미국의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치명적 결함으로 생각하였었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 국가에서 인디언들은 절멸되도록 운명 지어졌고, 흑인들의 존재는 미국 연방 미래를 위협하는 최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당시 이미 인종 차별주의의 배타성이 미국의 국가 성격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인종을 미국으로 용해시키는 미국의 기치와 방향은 결국 자유를 억압받고 권리 행사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위력을 나타냈으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대통령이 1943년에 말한 아메리카즘은 결코 인종과 조상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신조인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가치가 비록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다시 한번 크게 도전 받고 있지만 미국의 가치를 미국인들 스스로 저버리지 않는 이상 인종간의 화합과 조화는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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