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공연을 다녀와서 - 성경과 음악의 만남

너무도 좋은 공연 감상하고 왔기에 글 적어봅니다


4 7 Den Haag에 있는 Dr. Anton Philipszaal에 바흐의 마태수난곡(Matthäuspassion BWV. 244)을 감상하러 다녀왔습니다. 비록 기독교 신자는 아닐지라도 고난주간 마지막 날인 토요일에 마태수난곡을 듣게 되어 더욱 의미 있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의 지휘자는 Jaap van Zweden였는데 바이올리스트이자 뛰어난 실력의 지휘자로 무척 저명한 사람입니다. 사진으로 익숙하던 얼굴의 인물을 멀리서나 보게 되니 반가웠습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그 길이가 3시간여에 달하고 규모도 큰 터라 한국에서는 공연장에서 풀타임으로 쉽게 접하기 힘든 곡입니다(간혹 한국에서 공연될 때 공연이 끝난 후 브라보를 외치는 사람이 있는데 수난곡의 경우는 브라보를 외치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번 공연을 소개해주고 같이 보러 간 친구가 부활절에 먹는 빵을 선물로 가져왔는데 그 정성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공연 시작전에 아이폰으로 찰칵. 실제로 보면 정말 아름다운 공연장입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제1부는 예수 수난의 예언의 합창에서 시작하여 예수의 체포로 끝이 나고 제2부는 체포된 예수를 염려하며 찾아 헤매는 시온의 딸들의 합창으로 시작하여 예수의 안식을 비는 결별의 레치타티보(낭독하는 듯 노래하는 방식)와 합창으로 전곡을 마칩니다. 수난곡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본래 수난곡(Passion)은 교회에서 수난 주간에 연주되는 음악입니다. 바흐는 마태복음 26, 27장을 기초로 하였으며 피칸더의 시의 내용을 사용하여 마태 수난곡을 완성하였습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고금의 수난곡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으나 사실은 바흐의 죽음 이후 한동안 잊혀져 악보만이 도서관에 잠들어있다가 멘델스존에 눈에 띄어 부활 상연된 곡입니다.

 

마태수난곡은 쉽게 연주될 수 있는 곡이 아닙니다. 복잡한 다성 합창, 단순하고 화정적인 코랄, 아리아, 성서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복음사가의 레치타티보가 이 작품 하나에 모두 녹아 있습니다. 편성은 합창단, 관현악 모두 2부로 나누어지며 합창은 4성부이며 소프라노 2, 복음사가 역할의 테너, 예수 역할의 베이스 그리고 소년 합창단이 참가합니다. 관현악부는 플루트, 오브에, 바이올린, 비올라, 다감바, 첼로, 오르간, 쳄발로 등 다양한 악기가 사용됩니다. 그래서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바로크 종교 성악곡과 세속 성악곡을 통틀어 모든 종류의 음악 형식을 다룬 만화경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

 

마태 수난곡에는 성경 속 친근한 이야기들이 녹아 있습니다. 유다의 배반, 최후의 만찬, 예수에 대한 모함, 예수를 부인하는 배드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 등 성경 내용 중에서도 많이 알려진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텍스트로 된 성경의 내용을 접하다 이렇게 음악 형식의 마태수난곡으로 성경의 내용을 접하니 그 감회가 참 새로웠습니다. 네덜란드어로 불리우는 가사를 이해할 수 없으니 미리 준비해간 마태수난곡에 대한 정보에 각 곡의 느낌과 그리고 제 상상력을 보태어 제 나름대로의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상상하고 느껴보았습니다. 장엄한 합창과 아리아 사이에 예수의 수난을 설명하는 레치타티보, 곡의 클라이막스를 만들어내는 합창과 코랄들은 성경의 이야기에 생생함을 더하여주었습니다. 특히 27곡 예수님이 붙잡히는 부분에서 이중창 속에서 합창이 그를 풀어주라!”, “그만 두어라!”, “묶지 말아라!”라고 짧게 응답하는 부분은 어찌도 강렬하던지요. 또한 49곡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노래하는 아리아의 애절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전 곡 중 가장 유명한 코랄인 , 피투성이가 된, 상처받은 머리의 대목에서는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 하였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합창과 코랄들, 성경 속 인물들의 느낌이 담긴 아리아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전해주는 레치타티보의 완벽한 조합에 거대한 공연장 안은 천상의 화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는 아닙니다만 성경의 이야기들을 참 좋아합니다. 성경에는 수 많은 지혜와 상상력이 담겨 있으며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성스러움이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 가신지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신 날이시지요. 기독교를 믿건 부활을 믿건 안믿건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성스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듯 합니다.

 

공연이 끝난 후 친구와 근처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하던 중에 친구가 성경 속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어. 예수가 질투심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거 라는걸 알고 있었고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거든. 그러자 유대인 제사장들이 그 죄를 우리가 뒤집어 쓸 테니 예수를 어여 십자가에 매달아 달라고 했어. 결국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 시킬 수 있게 된 빌라도는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지. 빌라도는 현명한 정치인이었을까? 그의 선택은 옳바른 것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하고 있는 것이 과거 유대인 제사장들과 다를 바 뭐가 있을까?”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마태 수난곡의 여운 속에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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